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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Special Knowledge (262) 암살의 역사

by 아자여 2011.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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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262) 암살의 역사
어둠 속의 살인. 암살(暗殺)은 정치 리더십을 교체하는 가장 급진적인 방식으로 불립니다. 중동의 폭군 무아마르 카다피(Muammar Qaddafi) 리비아 최고지도자의 처리를 놓고 국제분쟁 전문가들 사이에선 공공연히 ‘암살이 최선의 해결책’이라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용병들을 시켜 무고한 리비아 국민을 살육하게 하는 카다피에게 그만큼 절망하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겠죠.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곤 했던 암살의 역사를 정리해 봤습니다.

서승욱 기자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를 통해 소개된 에피소드는 카다피가 얼마나 암살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지 보여준다. 1994년 카다피는 비밀리에 입국한 브라질 성형외과 의사 두 명에게서 안면 주름살 제거와 모발 이식수술 등을 받았다. 의사들은 전신마취를 권했지만 암살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카다피는 부분마취를 고집했다고 한다. 그래서 4시간 동안 카다피는 정신이 말똥말똥한 상태에서 수술을 받았다고 신문은 전했다.

카다피처럼 40년 넘게 철권통치를 해온 독재자들만 암살의 대상이 되는 건 아니다.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존경받는 인도의 간디, 미국의 링컨 대통령, 종교전쟁의 막을 내리게 한 프랑스의 성군(聖君) 앙리 4세도 암살로 생을 마쳤다. 또 우연에 우연이 겹쳐 성공한 암살 때문에 역사의 물줄기가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1 단검에 23번 찔린 카이사르

“브루투스 너마저….”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복자이자 지배자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가 죽어가며 남겼다는 말이다. 카이사르가 진짜 이 말을 했는지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브루투스 너마저…”란 말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 등장하는 대사로 유명해졌지만, 실제론 단검에 찔린 카이사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숨졌다는 게 정설이다.(스티븐 파리시언 저 『암살의 역사』 중에서)

카이사르 암살은 역설적이다. 카이사르를 죽인 원로원의 정적들은 카이사르 스스로가 왕이 되려 할까 봐 그를 암살했지만, 그 죽음이 오히려 로마의 왕정을 앞당기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본인이 정복한 갈리아(북이탈리아·프랑스·벨기에 일대)의 총독이던 기원전 49년 1월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돌아오라’는 원로원의 명령을 받았다. 원로원과 불편한 관계였던 카이사르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며 자신의 군대와 함께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했다. 정적 폼페이우스와 그의 잔당까지 완전히 소탕한 그는 기원전 45년 로마의 1인 지배자인 ‘종신 독재관’이 돼 각종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카이사르에게 권력이 집중되자 원로원은 ‘공화정을 철폐하고 카이사르 스스로가 왕이 되려는 것 아니냐’고 두려워했다. 그래서 한때 카이사르의 절친한 친구였던 브루투스와 공모자들이 살해 조직을 만들었다. 그들은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를 원로원 건물 안에서 단검으로 스물세 군데나 찔렀다.

하지만 로마의 여론은 암살자들의 예상과 딴판이었다. 숨진 카이사르에겐 동정이 쏟아졌다. 암살자들은 대부분 처형을 당했고, 브루투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결국 카이사르가 후계자로 지목한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첫 황제가 됐다.

2 머리까지 잘린 ‘프랑스 성군’의 수난

앙리 4세의 초상
지난해 12월 프랑스의 한 대학병원 법의학 연구팀은 “민간인이 소장하고 있는 머리 부분 미라가 부르봉 왕조의 시조 앙리 4세의 것으로 확인됐다”고 발표했다. 1610년 암살된 앙리 4세의 유골은 프랑스 혁명 시기인 1793년 군중들이 왕족들의 묘를 파헤쳐 부관참시하는 과정에서 머리가 잘려진 뒤 버려졌다. 연구팀은 ▶콧구멍 위에 난 상처 ▶귀걸이 착용을 위한 오른쪽 귓불의 구멍 ▶방부 처리에 사용된 유향 등을 근거로 머리 미라의 주인공이 앙리 4세라고 발표했다.

프랑스 국민들은 흥분했다. 앙리 4세는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성군’이란 칭송을 받은, 그래서 ‘선량왕’으로 불린 인물이다. 원래 신교도였으나 가톨릭교와 신교 간의 갈등을 무마하기 위해 가톨릭교로 개종했다. 1594년 왕으로 즉위한 뒤엔 신교도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낭트 칙령을 공포해 종교분쟁을 종식시켰다.

국민들의 경제생활 개선을 1차적인 정치의 목표로 삼는 실용적인 리더십을 추구했다. 유명한 재상 쉴리를 통해 의욕적인 사업도 펼쳤다. 파리의 명물인 퐁네프 다리도 이때 건설됐다. 하지만 앙리 4세의 운명은 비극으로 끝났다. 1610년 군대를 지휘하러 가는 마차 안에서 광신적인 가톨릭 극단주의자의 단도에 찔려 숨을 거두었다. ‘프랑수아 라바이악’이란 이름의 이 암살자는 능지처참을 당했다고 한다.

3 ‘재임 중 암살당한 첫 미국 대통령’의 비극

링컨
1865년 4월 14일 워싱턴 DC 중심가의 포드 극장. 미국인들에게서 가장 존경받는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재임 중 암살당한 첫 미국 대통령’으로 기록되는 비극의 현장이다. 남부군의 리 장군이 4월 9일 북부군의 그랜트 장군 앞에서 남북전쟁 항복 문서에 서명한 지 5일째 되던 날이었다. 링컨은 영국인 극작가 톰 테일러의 연극 ‘우리 미국인 사촌(Our American Cousin)’을 관람하기 위해 부인 메리와 극장을 찾았다. 암살자인 존 윌키스 부스는 공범들과 함께 이미 치밀한 암살계획을 세워뒀다. ‘관객들의 웃음소리가 총성을 덮어줄 것’으로 기대하며 기회를 엿보던 그는 주연배우 해리 호크의 긴 대사로 웃음이 터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대통령의 뒤통수를 쏘았다. 암살자는 사건 직후 “폭군의 말로는 늘 이렇다” “남부는 복수했다”고 외쳤다고 한다.

연극배우였던 27세의 암살자는 열렬한 남부동맹 지지자였다. 연극 관람을 즐겼던 링컨은 암살되기 몇 년 전 암살자인 부스의 공연을 포드 극장에서 본 일이 있었다. 당시 링컨은 “부스를 만나고 싶다”고 청했지만 부스는 이를 거절했다. 링컨으로선 2년 뒤 자신을 죽일 미래 암살자의 팬을 자처한 셈이었다. 링컨은 총을 맞은 이튿날 56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고, 말을 타고 도망쳤던 암살자 부스는 12일 동안 북부군에 쫓기다 총을 맞아 숨졌다.

4 엉성한 암살자들의 우연한 성공

1914년 6월28일 오스트리아 황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하는 장면을 재연한 그림. 부부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의 총에 맞았고 이 사건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의 도화선이 됐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의 도화선은 사라예보발 암살사건이었다. 오스트리아 황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 기차편으로 도착했다. 그가 이곳을 찾은 건 오스트리아에 적대적인 이곳 민심을 다독이기 위해서였다. 당시 보스니아 내부의 세르비아인 거주지역을 독립시키길 원했던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흑수단(Black Hand)’이란 테러단체를 결성해 호시탐탐 오스트리아 고위 인사들의 목숨을 노렸다. 이들에게 황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꽤 매력적인 먹잇감이었다.

1차대전을 촉발시킨 엄청난 결론에 비해 암살 과정은 조잡했고, 희극적이기도 했다. 흑수단은 사라예보 거리에서 카퍼레이드 도중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암살키로 하고 곳곳에 요원들은 배치했지만 이들의 행동은 한마디로 ‘실수의 연속’이었다.

암살요원들 중 대공의 차를 처음으로 마주친 요원은 용기가 나지 않아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고 서있기만 했다. 또 두 번째 요원은 수류탄을 던졌지만 대공의 차가 아닌 뒤쫓아 오던 차 앞에서 폭발했다. 대공은 멀쩡했지만 대신 20명의 다른 부상자를 낳았다.

실패로 끝날 것이 확실해 보였던 엉성한 암살작전이 성공한 것은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돌출행동 때문이었다. 카퍼레이드에 이어 열린 환영 리셉션에서 그는 “폭탄테러 사건으로 부상당한 사람들을 위해 병원으로 위문을 가겠다”며 병원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그의 운전사는 병원으로 가는 길을 잘못 통보받았고, 길을 잃은 자동차가 멈춰선 곳은 흑수단의 암살요원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요기를 하기 위해 찾은 매점 ‘시러 식품점(Schiller’s delicatessen)’ 앞이었다. 기가 막힌 우연이었다. 기회를 잡은 20세의 암살자 프린치프는 곧바로 차 안으로 총을 쏘아댔고, 대공과 그의 부인은 숨을 거뒀다.

이후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오스트리아·독일·이탈리아의 3국동맹이 활동을 개시하면서 1차대전이 시작됐다.

5 끝나지 않은 논란, 케네디

1963년 11월22일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뒷자리 왼쪽)이 링컨콘티넨털 오픈카를 타고 카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케네디 전 대통령은 이 사진이 촬영된 뒤 불과 수 분만에 암살됐다. 케네디의 옆엔 재클린 여사가, 앞 좌석엔 존 코넬리 텍사스 주지사 부부가 앉아있다.


존 F 케네디의 암살만큼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킨 사건도 흔치 않다. 미국 사회의 역동성을 상징하는 젊고 유능한 대통령은 1963년 11월 22일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링컨콘티넨털 오픈카를 타고 카퍼레이드를 벌이다 교과서 보관창고 직원 하비 오스월드(사진)에게 저격을 당했다. 창고 건물 6층에서 세 발의 라이플 총탄을 발사한 오스월드는 사건 발생 80분 뒤에 검거된 뒤 “난 아무것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방패막이”라고 주장했다. 암살 이틀 뒤 오스월드 역시 댈러스의 나이트클럽 주인 잭 루비에 의해 사살당했다.

FBI 등은 오스월드의 단독범행으로 결론지었지만, 40년이 훨씬 더 지난 최근까지도 공모설과 음모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오스월드가 총을 발사한 창고 건물 건너편에서 신원이 밝혀지지 않는 암살자가 네 번째 총탄을 발사했다는 목격자들의 증언도 나왔다. 케네디와 핵미사일 문제로 대립했던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미국 중앙정보국, 소련 등이 배후로 거론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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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joinsmsn.com/article/044/522104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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