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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제노포비아 |
끊어질 듯 이어지는 것이 ‘선(線)’이다. 생명선은 숨을 잇고, 전화선은 사랑을 잇는다. 이처럼 선의 속성은 본디 ‘이음’이다. 그런데 지금의 선은 ‘단절’이다. 너와 나, 여기와 저기를 가른다. ‘선을 긋다’ ‘선을 넘는다’고 할 때 선은 ‘금(禁)’이다. 이 때문일까. 선과 선이 만나는 접선(接線)은 오히려 은밀하고 비밀스럽다. 다른 종족에 선을 그은 대표적인 민족이 유대인이다. ‘이방인’이란 말도 여기서 나왔다. 물리적 공간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선을 그었다. 이방인과는 통혼(通婚)조차 꺼렸다. ‘제노포비아(xenophobia)’의 원조 격이다. 이방인과 낯선 이를 뜻하는 그리스어 ‘제노(xeno)’에 공포와 혐오란 뜻의 ‘포비아(phobia)’가 붙었다. 우리도 비슷하다. 고대 동예(東濊) 역시 지독한 이방인 기피증이 있었다. 부족끼리도 경계선을 넘으면 노예나 말로 벌금을 물어야 했다. 바로 책화(責禍)다. 그래도 족외혼(族外婚)을 했다. 종족의 번성을 위해서는 선을 넘어야 했던 것일까. 외국인을 기피하면서도 다문화가정이 늘어나는 현실과 어쩐지 맥이 닿아 있다. 최근 노르웨이에서 저질러진 반(反)다문화 극우주의자의 테러에 세계가 전율하고 있다. ‘노동력의 대이동’ 시대 음울한 이면(裏面)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러시아에서 ‘스킨헤드’로 불리는 인종주의자들이 공연장에서 테러를 저질러 10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관용이란 뜻의 ‘톨레랑스’로 유명한 프랑스도 근래 이주민에게 강경한 정책으로 돌아섰다. 터키 이주민에 대한 반감을 바탕으로 독일에 ‘신나치’가 등장하고 있다. 근본 배경은 ‘일자리’다. 진(秦)의 천하통일에 초석을 놓은 이사(李斯)도 ‘객경(客卿)’과 ‘축객(逐客)’을 오갔다. 외국인에게 일자리를 빼앗긴 신하들이 “외국인은 믿을 수 없다”고 왕을 충동질한 것이다. 이사는 초(楚)나라 사람이었다. 그의 항변은 광고 문구로도 유명하다. ‘하해불택세류(河海不擇細流)’다. 황하와 바다는 작은 물줄기도 가리지 않고 받아들여 깊다는 얘기다. 왕 역시 뭇 백성을 물리치지 않아 덕(德)을 밝힐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현대적으로 보면 대국(大國)은 외국인을 배척하지 않아서 이뤄진다고 할까. 우리도 외국인 126만 명 시대다. 그가 이방인이면 나 역시 그에게 이방인이다. 모두가 모두에게 이방인이면 우리는 사막 위 낯선 존재가 된다. 내 안에 ‘제노포비아’는 없는지 체크할 일이다. 박종권 jTBC특임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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