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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고금통의 古今通義]
차작학사 |
이덕일
역사평론가
명재(明齋) 윤증(尹拯)은 숙종 9년(1683) 아들 충교(忠敎)에게 보낸 편지에서 “명지(名紙 : 과거 답안지)를 자신이 스스로 쓸 수 없다면 과거에 나아갈 계획을 하지 말라”면서 “차작(借作)과 차필(借筆)은 모두 죄가 있는 것이니 선비(士)가 어떻게 금령을 무릅쓰고 할 수 있겠느냐?”라고 충고하고 있다. 노론(老論)이란 당파가 수백 년을 집권할 수 있었던 이유도 차작 때문이었다. 적당히 공부하는 시늉만 하면 차작과 차필로 과거에 급제해 돈과 권력을 세습할 수 있었다. 주자학은 유일사상이었지만 공자의 참뜻은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었다. 노(魯) 애공(哀公)이 ‘유자(儒者)의 도(道)가 없으면서 유자의 옷을 입으면 사형시키겠다’는 명을 선포하자 5일 만에 유자들이 모두 사라지고 단 한 명만 유복(儒服)을 입고 나타났다는 『장자(莊子)』 『전자방(田子方)』의 이야기는 마치 조선 후기를 묘사한 것 같다. 서자였던 유득공(柳得恭)이 같은 서자였던 이덕무(李德懋)를 추모하며 지은 『보파시장(補破詩匠)』이란 글이 있다. ‘깨진 시를 때우는 장인’이란 뜻이다. 유득공이 이덕무의 우거(寓居)를 찾았을 때 제자로부터 ‘굶은 지 이틀 되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곤궁하게 사는 이덕무였지만 당대 최고의 학자였기에 시나 문장을 고쳐달라고 찾아오는 사대부가 많았다. 하루는 이덕무가 붓을 던지면서, 유득공에게, “서울에는 온갖 물건을 고치는 수선공[補破匠]이 있어서 깨진 쟁반, 찢어진 가죽신, 찢어진 망건 등을 고쳐 생계를 꾸리는데 그대와 나는 붓 한 자루와 먹 하나를 가지고 ‘잘못된 시[破詩]를 고치라’고 외치면서 다니면 어찌 술과 안주를 얻을 수 없겠는가?”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보파시장(補破詩匠)』이다. 시나 문장을 지을 줄 모르는 사대부였지만 돈과 권력을 갖고 있었다. 차작과 차필로 과거에 급제한 인물들을 차작학사(借作學士), 또는 차작진사(借作進士)라고 불렀다. 현재 우리 사회에도 차작학사, 차작진사가 숱하다는 사실은 비밀도 아니다. 한 국회의원 당선자의 논문 대필 사건은 빙산의 작은 부분이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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