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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차작학사

by 아자여 2012.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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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고금통의 古今通義] 

 

 차작학사

 

이덕일
역사평론가

 

남이 답안을 대신 써 주는 것을 차필(借筆), 또는 차작(借作)이라고 한다. 가장 성행한 것이 과거 답안지 차작이었다. 순암 안정복(安鼎福)이 쓴 『진사 황최(黃最) 묘지명』에는 황최가 “과거장에 들어가서 몸소 시권(試卷:답안지)을 쓰자 사람들이 ‘시속의 모양과 합하지 않는다’고 허물했다”고 전한다. 직접 답안지를 작성하는 것을 허물할 정도로 차작이 유행했다는 뜻이다. 황최는 이에 대해 “나의 기량을 다할 뿐이니 차서(借書)로써 요행을 바라지 않겠다”고 답했다.

 명재(明齋) 윤증(尹拯)은 숙종 9년(1683) 아들 충교(忠敎)에게 보낸 편지에서 “명지(名紙 : 과거 답안지)를 자신이 스스로 쓸 수 없다면 과거에 나아갈 계획을 하지 말라”면서 “차작(借作)과 차필(借筆)은 모두 죄가 있는 것이니 선비(士)가 어떻게 금령을 무릅쓰고 할 수 있겠느냐?”라고 충고하고 있다.

 노론(老論)이란 당파가 수백 년을 집권할 수 있었던 이유도 차작 때문이었다. 적당히 공부하는 시늉만 하면 차작과 차필로 과거에 급제해 돈과 권력을 세습할 수 있었다. 주자학은 유일사상이었지만 공자의 참뜻은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었다. 노(魯) 애공(哀公)이 ‘유자(儒者)의 도(道)가 없으면서 유자의 옷을 입으면 사형시키겠다’는 명을 선포하자 5일 만에 유자들이 모두 사라지고 단 한 명만 유복(儒服)을 입고 나타났다는 『장자(莊子)』 『전자방(田子方)』의 이야기는 마치 조선 후기를 묘사한 것 같다.

 서자였던 유득공(柳得恭)이 같은 서자였던 이덕무(李德懋)를 추모하며 지은 『보파시장(補破詩匠)』이란 글이 있다. ‘깨진 시를 때우는 장인’이란 뜻이다. 유득공이 이덕무의 우거(寓居)를 찾았을 때 제자로부터 ‘굶은 지 이틀 되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곤궁하게 사는 이덕무였지만 당대 최고의 학자였기에 시나 문장을 고쳐달라고 찾아오는 사대부가 많았다. 하루는 이덕무가 붓을 던지면서, 유득공에게, “서울에는 온갖 물건을 고치는 수선공[補破匠]이 있어서 깨진 쟁반, 찢어진 가죽신, 찢어진 망건 등을 고쳐 생계를 꾸리는데 그대와 나는 붓 한 자루와 먹 하나를 가지고 ‘잘못된 시[破詩]를 고치라’고 외치면서 다니면 어찌 술과 안주를 얻을 수 없겠는가?”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보파시장(補破詩匠)』이다.

 시나 문장을 지을 줄 모르는 사대부였지만 돈과 권력을 갖고 있었다. 차작과 차필로 과거에 급제한 인물들을 차작학사(借作學士), 또는 차작진사(借作進士)라고 불렀다. 현재 우리 사회에도 차작학사, 차작진사가 숱하다는 사실은 비밀도 아니다. 한 국회의원 당선자의 논문 대필 사건은 빙산의 작은 부분이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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