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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고금통의 古今通義] 꽃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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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꽃놀이를 상화(賞花), 또는 심화(尋花), 심방(尋芳)이라고도 한다. 봄이 되면 궁 안팎 여러 곳에서 꽃놀이가 열렸는데, 『국조보감(國朝寶鑑)』에는 조선 중종 때 경회루(慶會樓) 아래에서 상화연(賞花宴)을 베풀었다는 기사가 있다. 단순히 꽃만 보자는 게 아니라 봄의 기운을 자연과 함께 나누자는 뜻이 담겨 있다. 고려 말기 문인 이규보(李奎報)는 ‘봄날 흥이 일어서(春日寓興)’라는 시에서 “새도 종일 쉬지 않고 지저귀며 웃으니/ 새도 꽃놀이 즐기는 소리인 줄 어찌 알지 않겠는가”라고 새도 사람처럼 꽃놀이를 즐긴다고 노래했다. 정자(程子)라고 불렸던 송나라 성리학자 정호(程顥)·정이 형제의 문집인 『이정전서(二程全書)』 ‘이천선생(伊川先生 : 정이) 연보(伊川先生年譜)’에는 어느 봄날 송 철종(哲宗)이 경연(經筵)을 마치고 난간에 기대서 버드나무 가지를 꺾자 정이(程伊川)가 “새 봄을 맞아 막 싹트는 나뭇가지를 까닭 없이 꺾으면 안 됩니다”라고 말렸는데 철종이 언짢게 여겼다는 기사가 있다. 정조는 매년 봄 신하들과 함께 창덕궁 북원(北苑 : 비원)의 연못 등에서 꽃놀이하면서 낚시하는 상화조어연(賞花釣魚宴)을 베풀었다. 정조가 한 수를 읊으면 신하들이 대구(對句)로 화답하는 연회였는데, 정조 19년(1795)의 상화조어연에는 정약용도 참가했다. 정조가 죽자마자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고 정약용은 유배가는데, 유배지 강진에서 연못에 핀 꽃을 보고 그 시절이 생각나서 ‘여몽령(如夢令)’이란 시를 지었다. “가만히 꽃놀이 잔치 추억하니/ 두 줄기 맑은 눈물 마구 흐르네/ 취한 듯, 취한 듯한 그때가 벌써 십 년 전 일이구나(細憶賞花筵/ 放下一雙淸淚/ 如醉/如醉曾是十年前事)”라는 시다. 지금은 서울에서 여의도 꽃놀이가 유명하지만 조선 때는 남산 꽃놀이와 살곶이 들판의 꽃놀이가 유명했다. 그래서 남산 꽃놀이란 뜻의 ‘목멱상화’란 시와 살곶이 들판의 꽃놀이란 뜻의 ‘전교심방(箭郊尋芳)’이란 시가 있다.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목멱상화’의 “누대에 은은히 비치는 붉은 빛이 비 온 듯하네(樓臺隱映紅似雨)”라는 구절은 진달래 등이 꽃놀이의 주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벚꽃이 꽃놀이의 대명사가 된 것이 과연 자연의 소이인지 인공의 소산인지 궁금하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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